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순간
기어이 이윤서라는 여자가 태경의 눈으로 파고들었다.
“각서라도 써 드릴까요? 다른 원하는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”
“그런 약속은 섣불리 하는 게 아니지. 내가 뭘 말할 줄 알고?”
어쩐지 태경은 커다란 눈 안 가득 고인 눈물을 툭 떨어트리고 싶었다.
곧 죽어도 자신 앞에선 울지 않겠다는 듯 사리문 입술을 훔치고
그 같잖은 자존심을 마구잡이로 긁고 싶었다.
“원하시는 대로…… 하겠습니다.
탁하게 가라앉은 태경의 눈이 음욕에 젖어 들고
두려움과 묘한 흥분감이 윤서의 몸을 잠식했다.
그리고…….
“나 없으면, 이제 안 되지?”
상체를 내린 태경이, 악마처럼 속삭였다.
지독하게 시린 눈빛이 원하는 대답은 한 가지였다.
“네. 안, 돼요……. 그러니까, 어서……. 빨리.”
마치 악마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윤서의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.